인공지능 기술 발전과 소수자 권리라는 사회적 의제가 맞닿는 영역으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언어 접근권의 미래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1. 청각장애인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수어와 음성 언어 사이의 간극
우리는 소리로 말하고 듣는 것을 ‘언어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청각장애인에게 언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청각장애인은 대부분 음성 언어를 듣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각적 언어인 수어를 주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포함해 많은 음성 언어 중심 사회에서는 여전히 수어가 ‘언어’로서 동등하게 인식되지 않거나,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사용됩니다.
사실 수어는 단순한 몸짓이나 제스처가 아니라, 고유한 문법과 구조를 가진 완전한 자연어입니다. 한국수어(KSL), 미국수어(ASL), 일본수어(JSL)는 모두 각 나라의 문화와 언어적 맥락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해온 고유한 언어 체계이며, 각기 다른 표현 방식과 문법을 지닙니다. 이 점에서 수어는 ‘번역 가능한 도구’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언어와 문화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다릅니다. 청각장애인은 학교, 병원, 관공서, 법정, 뉴스 등 일상 전반에서 정보 접근에 큰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수어 통역사가 항상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공서비스에서는 수어 대신 문자 통역이나 자막 제공이 일반적인데, 이는 수어 화자에게 모국어가 아닌 제2언어(문자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기 때문에 정보의 정확성과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수어 사용자에게는 ‘자막’이 완전한 대안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수어 기술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받는 것이 바로 딥러닝 기반 번역기와 수어 인식기입니다. 각각은 음성 언어 기반 접근과 수어 기반 접근을 대표하는 기술이며, 청각장애인의 언어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도구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기술은 철학도 다르고, 기술적 과제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접근법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2. 딥러닝 기반 번역기와 수어 인식기: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딥러닝 기반 번역기는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구글 번역, 파파고, 딥엘 같은 시스템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딥러닝 기술은 수천만 문장의 병렬 데이터를 학습해 언어 간의 의미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음성 언어 간 번역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확도를 보이고 있지만, 수어 번역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수어는 손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표정, 시선, 몸의 위치, 움직이는 속도 등 다양한 비언어적 요소들이 결합된 3차원적이고 시각적인 언어입니다. 단어를 하나하나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 전체를 해석해야 하고, 사용자의 감정 상태나 문화적 뉘앙스도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텍스트 기반 번역기로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이에 비해 수어 인식기는 이러한 비언어적 특성까지 학습하려는 시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집니다. 비전 AI와 센서 기반 딥러닝 모델을 결합해, 사용자의 손짓을 실시간으로 인식하고 이를 문자 또는 음성 언어로 변환하는 방식이죠. 최근에는 카메라 하나만으로 손의 위치와 움직임을 인식하는 2D/3D Skeleton Tracking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용 장비 없이도 수어 인식 정확도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어는 단지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문법 구조가 음성 언어와 다르며, 지역별, 개인별 차이가 큰 점도 기술적 도전 과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으며, 같은 손짓도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어 인식기는 문장 단위에서의 의미 해석과 자연어 생성 능력이 함께 개발되어야 하며, 이는 기존 번역기보다 훨씬 복잡한 언어 모델을 필요로 합니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언어 권리’의 관점입니다. 딥러닝 번역기는 수어를 ‘해석 가능한 기호’로 보고 문자 언어로 바꾸려 하지만, 수어 사용자에게 이는 모국어를 다른 언어로 의도치 않게 강제 변환당하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반면, 수어 인식기는 수어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접근’이자, 수어 사용자와 비수어 사용자 간의 양방향 통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기술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청각장애인의 언어 접근권을 위한 기술의 진짜 방향은?
딥러닝 기반 번역기든, 수어 인식기든, 중요한 것은 기술이 향하는 방향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기술들은 청각장애인의 ‘언어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종종 기술의 성능과 효율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사용자 중심의 설계가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청각장애인의 언어 접근권은 단순히 정보를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로 말하고, 표현하고, 타인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청각장애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언어적 평등을 실현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기술은 보조도구가 아니라, 포용적 설계의 일부로 기능해야 하죠.
실제로 수어 인식 기술을 바탕으로 한 시범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방향성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AI 수어 통역기 키오스크를 도입해 청각장애인이 관공서에서 민원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일부 특수학교에서는 수어 인식 기술을 활용해 교과 콘텐츠를 수어 기반으로 구성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보조’가 아니라, 수어를 중심으로 교육과 서비스를 재설계하는 포용적 접근입니다.
또한 수어 인식기는 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양방향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청각장애인이 수어로 표현하면 비장애인이 음성으로 듣고, 비장애인이 말하면 자동으로 수어 애니메이션이나 번역으로 변환되는 시스템은 상호 존중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합니다. 이는 청각장애인이 언어적 소수자가 아닌, 언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반면, 딥러닝 기반 번역기는 빠르고 간편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청각장애인의 언어권보다는 편의성 중심의 접근이라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특히 공공기관이나 교육 현장에서 ‘자막이 있으니 충분하다’, ‘문자 통역으로 대체하자’는 식의 접근은 수어 사용자에게 모국어 학습 기회를 제한하고, 정보 이해의 질을 낮출 수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언어 소외를 더 고착화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술의 미래는, 단지 ‘더 잘 번역하는 기술’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자 중심으로 언어를 해석하고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이 언어를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사용하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어를 존중하는 기술, 사용자 커뮤니티와 함께 설계하는 기술, 그리고 소통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결국, 딥러닝 기반 번역기와 수어 인식기 모두 청각장애인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구가 어떻게 쓰이는가, 누구를 중심으로 설계되는가, 어떤 가치에 기반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언어 접근권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둘 때 비로소 진짜로 열릴 수 있습니다.